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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2]여흥민씨족보(驪興閔氏族譜)1802년(순조 2)에 민창혁(閔昌爀)이 주축이 되어 간행된 여흥민씨의 족보이다. 여흥민씨는 고려시대에도 많은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며, 조선시대에는 태종비 원경왕후를 비롯하여, 숙종비 인형왕후, 고종비 명성황후, 순종비 순명황후를 배출한 가문이다. 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따라서 본 족보는 이러한 여흥민씨 일족의 인물을 모두 수록하고 있어 큰 의의를 지닌다. 또한 1802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간행된 족보여서 그 가치가 더욱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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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족보는 1802년 閔昌爀에 의해 편집되어 간행된 여흥민씨족보이다. 모두 20권21책으로 되어 있으며, 마지막 1책은 別譜이다.
[내용 및 특징] 1. 『여흥민씨족보』의 편찬 경위여흥민씨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많은 왕비를 배출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 여흥부원군 민제(1399~1408)의 딸이 태종비인 원경왕후가 됨으로써 더욱 굳건해졌다. 조선초 원경왕후의 本系를 撰譜하여 돈녕부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여흥민씨족보 편찬의 시초이다. 그 후 1478년(성종 9) 閔奎에 의하여 『驪興閔氏族譜』가 간행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의 본계와 외계를 修譜하여 돈녕부에 보관하게 하였으며, 이것은 1487년 정월 『章順王后 恭惠王后外家閔氏族譜』로 간행되었다. 다음으로 1622년(광해 14) 閔仁伯에 의해 다시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들 족보는 임진년의 변란으로 모두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조선 후기에 들어 1671년(현종 12)에 각종 문헌을 의지하여 8편으로 『신해보』가 만들어 졌으며, 40년 후인 1713년(숙종 39)에 다시 증보되었다. 이후 90여년이 지나 1797년(정조 21) 민백준, 민백겸이 주축이 되어 족보 편찬을 진행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결국 1802년(순조 2) 민창혁에 의하여 본 족보가 간행되었다. 2. 『여흥민씨족보』의 내용 및 편찬 체제 족보의 수권에는 ‘범례’, ‘구보서발과 민씨세계원류’, ‘민씨여사입전’, ‘여지승람’, ‘족보후서’, ‘편차배자’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처음에 나오는 ‘驪興閔氏族譜序例’는 1713년(숙종 39) 閔鎭厚가 작성한 것으로 범례가 아니라 서문이다. 본래 족보의 서문으로 작성된 것으로 간단한 가계와 족보편찬의 경위, 수록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러나 1802년 간행되면서 ‘범례’의 형태로 변개하여 수록하였다. 뒤 이어서 ‘新凡例’ 8조가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1478년(성종 9) 閔奎가 작성한 「驪興閔氏族譜舊序」가 수록되어 있는데, 중간중간 자세한 주석을 첨가하였다. 그 뒤로 「閔氏世系原流」가 있고, 다음으로 1487년 閔泮이 작성한 「章順王后 恭惠王后外家閔氏族譜序』, 柳德種이 쓴 「驪興閔氏族譜序」, 1622년(광해 14) 閔仁伯이 쓴 「舊譜後跋」이 있다. ‘민씨여사입전’은 文景公傳(閔令謨, 子 湜 附)과 忠順公傳(閔宗儒, 子 頔, 孫 思平 및 忭, 曾孫 霽 附), 閔曦事蹟 등이 그 내용이다. ‘輿地勝覽’은 驪州의 建置沿革 및 姓氏, 各地의 閔氏事蹟을 뽑아 얻은 것이다. 마지막에는 1802년 閔昌爀이 쓴 「驪興閔氏族譜後叙」가 수록되어 있다. ‘편차배자’는 권1부터 권19까지의 권별 수록 목록으로 천자문의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별보」는 따로 천자문의 순서로 다시 배열하고 있다. 권1부터 권19까지는 세계도인데, 모두 7단으로 출생순서에 따라 수록하고 있다. 또한 각 면의 맨 윗단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에는 성씨를 표시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여흥민씨의 시조는 고려 중엽 중국 사신 민칭도(閔稱道)의 고려귀화설과 민굴설(閔窟說)의 2가지가 전하고 있다. 민굴설은 경기도 여주 영월루 근처 민굴(일명 마암굴)에서 여흥민씨의 시조가 나왔다는 설화이다. 현재 여흥민씨는 설화로서의 민굴설보다는 민칭도의 고려귀화설에 근거하여 민칭도를 시조로 삼고 있다. 시조 민칭도는 공자의 제자 십철(十哲) 가운데 하나인 노나라 민자건(閔子騫)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민칭도는 고려 중엽에 중국사신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3세 민의(閔懿)는 시랑전악부정승(侍郞典嶽副政丞)을 지냈다.여흥민씨 가문은 4세 민영모(閔令謨)가 고려 인종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른 후 가세가 확대되었다. 현재 민영모의 묘단은 충북 음성군 사창리(社倉里)에 위치하고 있다. 여흥민씨는 조선이 개국하기 전 민선(閔璿)의 딸이 이성계의 넷째 아들인 이방간(李芳幹)과 혼인을 하고, 11세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과 혼인을 하면서 이성계가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하면서 민제의 딸 원경왕후도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태종의 외척에 대한 견제로 인해 원경왕후의 형제들이 모두 죽게되었고, 민제의 후손인 문도공파(文度公派)는 멸문의 화를 당하여 그 이후 중앙정계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여흥민씨 가문에서 원경왕후의 친정인 여흥민씨 가문이 멸문지화를 겪은 이후, 왕비의 외조부 가문으로서 여흥민씨는 혼인전략을 통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단종비 정순왕후(貞順王后)는 민소생(閔紹生)의 외손녀이고,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는 민대생(閔大生)의 외손녀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원경왕후가 왕비가 된 이후 여흥민씨 가문에서는 성종대까지 여성들을 매개로 하여 왕실의 외척으로서 그 지위가 이어졌다. 그리고 정순왕후와 장순왕후, 공혜왕후의 외할아버지인 민소생과 민대생은 민지(閔漬)의 후손들로 형제지간이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세조에 의해 남편 단종이 폐위되어 죽고,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와 공혜왕후는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다. 즉 여흥민씨 가문은 원경왕후를 처음 왕비로 배출한 이후 17세기에 다시 인현왕후를 배출하기 전까지 외척가문으로서의 지위를 이어오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여주와 개성, 통진(현재 김포지역) 등 경기도 일원에서 살아왔던 여흥민씨는 12세 민심언(閔審言)의 둘째아들 민충원(閔沖源)대에 충청도 유성과 회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이 지역의 유력한 재지사족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과거시험을 통해 사관(史官)으로서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인물들이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인물로서 인현왕후의 선조가 되는 민수(閔粹)와 민제인(閔齊仁)을 들 수 있다. 민수는 세조대 사관을 지냈는데 훈구대신들의 비리를 공격하다가 1469년(예종 1) ‘민수의 사옥’을 겪기도 하였다. 그 후 문장과 역사에 능통하여 중종대 사관을 역임한 민제인은 1548년(명종 3) ‘안명세 필화사건’에 저항하다 공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여흥민씨는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러서 20세 민광훈(閔光勳)이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그의 세 아들인 민시중(閔蓍重), 민정중(閔鼎重), 민유중(閔維重)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17세기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그 당시 민광훈과 그의 아들 민시중, 민정중, 그리고 손자 민진장(閔鎭長)이 문과에 장원하면서 ‘삼세문장(三世文章)’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이들은 민광훈을 파조로 하는 여흥민씨 삼방파(三房派)를 형성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서인과 노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리고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가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면서 17세기에 이르러서 여흥민씨 가문에서 두 번째로 왕비를 배출하게 되었다. 인현왕후와 원경왕후는 9세 민적(閔頔)을 공동조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민적의 아들대에 이르러서 파가 나뉘었다. 원경왕후의 조상은 민적의 셋째아들 민변(閔忭)-민제(閔霽)로 이어지며 문도공파(文度公派)를 형성하였고, 인현왕후의 조상은 민적의 둘째아들 민유(閔愉)-민심언(閔審言)으로 이어지는 가계를 형성하였다. 이처럼 여흥민씨는 고려시대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왕실의 인물 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가와의 혼인관계를 밝히는 데에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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