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분류 > 고서 > 금석문 > 경덕궁비계영경비(敬德宮丕啓靈慶碑)

UCIG002+JSK+KSM-WH.1694.0000-20150515.25220
분류
형식분류고서-금석문
내용분류교육/문화-예술-금석문
소장처유형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피전자
신분 조선 왕족
호칭 태조(太祖)
인명 이성계(李成桂)
본관 전주(全州)
생년 1335
몰년 1408
참조UCI G002+AKS-KHF_12D0DCC870FFFFB1335X0
역할 찬자-전면(前面)
신분 조선 왕족
호칭 숙종(肅宗)
인명 이순(李焞)
본관 전주(全州)
생년 1661
몰년 1720
참조UCI G002+AKS-KHF_12C219C885FFFFB1661X0
역할 찬자-음기(陰記)
신분 조선 문신
호칭 하곡(霞谷)
인명 권유(權愈)
본관 안동(安東)
생년 1633
몰년 1704
참조UCI G002+AKS-KHF_12AD8CC720FFFFB1633X0
역할 서자-전면(前面)
신분 조선 왕족
호칭 숙종(肅宗)
인명 이순(李焞)
본관 전주(全州)
생년 1661
몰년 1720
참조UCI G002+AKS-KHF_12C219C885FFFFB1661X0
역할 서자-음기(陰記)
신분 조선 문신
호칭 휴곡(休谷)
인명 오시복(吳始復)
본관 동복(同福)
생년 1637
몰년 1716
참조UCI G002+AKS-KHF_13C624C2DCBCF5B1637X0
역할 전서자
신분 조선 문신
호칭 남록(南麓)
인명 권규(權珪)
본관 안동(安東)
생년 1648
몰년 1722
참조UCI G002+AKS-KHF_12AD8CADDCFFFFB1648X0
역할 각자
인명 미상
작성지역
지역 황해도 개성시 (현재주소 : 황해도 개성 추동(楸洞) 용수산(龍峀山))
작성시기
연도 1694
형태사항
유형사적비(事蹟碑)
크기(cm) 세로 : 전292.1/음기279.6, 가로 : 전105.7/음기111.7
판본권자본(卷子本)
장정
탁본형태습탁(濕拓)
탁본서체 비액 : 전서(篆書), 비신 : 해서(楷書)
수량2면
판식
재질
표기문자한자
인장
개수형태색깔크기(cm)인문
비고
[청구기호]

2-5220-1, 2-5220-2

[건립/중립 연대]

1694년(건립)

소장정보
원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현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1694년(숙종 20)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사저인 경덕궁(敬德宮)에 세운 사적비(史蹟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표제경덕궁비계영경비(敬德宮丕啓靈慶碑)

[내용 및 특징]
1694년(숙종 20)에 세운 사적비로, 전면의 글씨와 시는 숙종의 어제어필이다. 음기의 찬자(撰者)는 권유(權愈), 음기의 두전(頭篆)은 권규(權珪)가, 음기의 서(序)와 명(銘)은 모두 오시복(吳始復)이 썼다.
경덕궁은 태조 이성계의 사저이다. 개성 중부 남계방(南溪坊: 속칭 楸洞)에 위치한다. 태조가 승하한 이후 역대 조선의 국왕은 국가를 개창하고 초석을 다진 이성계의 옛 집을 정비하고 여러 추숭사업을 벌였다.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그 사실들을 확인해 보면, 우선 태종은 중신들과 상의하여 궁을 증설하였으며, 1418년(태종 18) 4월에 새 누각을 준공하였고, 같은 해 7월에 또 북량정(北凉亭)을 신축하였다. 정종이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다시 도읍을 개성으로 옮긴 뒤 태종이 즉위하자 본궁이 협소해서 위사(衛士)들이 노숙을 하는 형편이라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환도한 뒤에도 후대 왕들이 구도(舊都)를 순행하거나 제릉(齊陵: 태조비 신의왕후 한씨의 능)과 후릉(厚陵: 정종과 그의 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을 참배할 때면 주로 이곳에서 묵었다. 그 밖에는 늘 비어 있었으며 중종 때 대대적인 수리계획을 세우고 29칸을 증축하려 하였으나, 풍년이 들 때 시행하는 것이 좋다는 중신들의 건의로 보류시켰다. 별제(別提) 2인을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 옛터만 남았다.
장서각에 소장된 《경덕궁비계영경비(敬德宮丕啓靈慶碑)》 탁본은 전면과 음기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전면의 상단은 숙종의 어필로 ‘경덕궁비계영경지비(敬德宮丕啓靈慶之碑)’라는 제액(題額)이 있고, 아래에는 우측에는 ‘어제어필(御製御筆)’임을 밝혔으며, 사저를 방문한 감상이 칠언시로 씌여 있다. 이 시는 『국조보감(國朝寶鑑)』제 49권에도 실려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去年重遇龍飛歲 작년에는 태조께서 왕이 되신 해를 다시 만났는데
今日欣瞻聖祖宮 오늘에 성조의 궁전을 기쁘게 우러르네.
奚但羹墻追慕倍 어찌 추모하는 마음 간절할 뿐이랴
緬懷洪烈意無窮 큰 공렬 생각하니 내 마음 끝이 없네.
시의 좌측에는 이 시를 쓴 시점인 ‘歲在甲戌之春書’라고 씌여 있다. 갑술년은 이 비석을 건립한 1694년(숙종 20)이다. 그러나 사실 이 시는 1683년(숙종 9) 5월에 숙종이 어제시(御製詩) 3수를 승정원에 내리고, 목판에 새겨 송도 남문 누각에 걸도록 명하면서 지은 시이며, 약 11년이 지난 1694년(숙종 20) 5월에 이 비를 세우면서 다시 쓴 것이다. 숙종의 시는 대자해서(大字楷書)로 씌여 있는데, 서체는 조맹부체를 기반으로 한 숙종의 유려한 해서체이다. 군데군데 행서의 운필을 섞어 유동성을 한층 배가시켰다. 숙종은 열성 가운데 조맹부체인 촉체(蜀體)에 가장 뛰어났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음기의 상단에는 ‘경덕궁비계영경지비명(敬德宮丕啓靈慶之碑銘)’이라는 전서가 씌여 있는데, 전서의 서자는 권규(權珪)이다. 권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1675년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때 강진으로 유배되었다가 1697년 풀려났고, 1721년에는 연잉군(延仍君)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임옥사로 소론이 집권하자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1723년 사망하였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서에 뛰어났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를 인용하여 전서를 잘 썼다고 기록하였다. 『숙종실록』에서도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의 비문과 전서를 쓸 사람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숙종이 ‘누가 전서를 잘하느냐?’고 묻자 오시복(吳始復)이 ‘이서우(李瑞雨)와 권규가 모두 전서에 능하다.’고 하였고, 숙종은 권규를 지명하였다. 그가 쓴 주요 금석문으로 《장경신도비(張烱神道碑)》, 《권대임신도비(權大任神道碑)》, 《박대립신도비(朴大立神道碑)》, 《통도사사리탑비(通度寺舍利塔碑)》, 《선암사중수비(仙巖寺重修碑)》 등의 전액을 남겼다. 권규는 특히 미수전(眉叟篆)을 잘 쓴 사람이다. 허목의 문인으로 평생 미수전을 따라 썼다. 이 비문의 전서도 소전의 필획과 미수의 대전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글씨이다.
음기의 비문을 찬술한 권유는 남인으로 기사환국 때 남인이 집권하자 대사간․예문관대제학 등 주요 요직을 역임하였다. 시문에도 능하여 왕실의 금석문도 많이 지었는데 《인경왕후지문(仁敬王后誌文)》 등이 장서각에 전한다.
음기의 글씨를 쓴 오시복은 숙종 때 대사간을 지낸 인물로, 1680년 강릉부사로 임명되었으나 경신대출척으로 파직,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조참판에 등용, 1691년 호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 겸 수어사, 1694년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이해 갑술옥사로 유배되었다. 이 글씨는 갑술옥사로 유배되기 전 호조판서로 있을 때 쓴 글씨이다. 갑술옥사는 3월에 일어났고, 이 비석의 건립은 5월이다. 따라서 갑술옥사 이전에 써 놓았다가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금석문으로는 《선무사양경리비(宣武祠楊經理碑)》, 《이성구비(李聖求碑)》, 《이덕형비(李德馨碑》, 《정홍익비(鄭弘翼碑)》, 《김호묘표(金濩墓表)》, 《육대흔묘표(陸大昕墓表)》, 《유영묘갈(柳潁墓碣)》, 《오단묘표(吳端墓表)》, 《강심묘표(姜沈墓表)》 등이 전한다.
이 자료와 관련하여 현재 장서각에는 《목청전비계영경비(穆淸殿丕啓靈慶碑)》가 전한다. 목청전은 경기도 개성시 운학동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옛 집이다. 이 비석은 본 자료와 같은 해인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사적비이자 사공비(事功碑)로, 숙종이 전면의 글씨를 쓰고, 권유(權愈)가 비문을 짓고, 이정(李瀞)이 음기를 글을 썼으며, 음기의 제액(題額)은 권규(權珪)가 썼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국왕의 탄생지에 대한 사적화(史蹟化) 과정을 살필 수 있고, 촉체로 대변되는 숙종의 어필과 미수전의 계승자 권규의 전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한국역대서화가사전』 /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 『조선금석총람』하 / 조선총독부 /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