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분류 > 고서 > 금석문 > 건릉지첩(健陵誌帖)

UCIG002+JSK+KSM-WH.1800.4159-20160515.B14b44
분류
형식분류고서-금석문
내용분류교육/문화-예술-금석문
소장처유형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인명 이성(李祘)
인명 윤행임(尹行恁)
인명 윤행임(尹行恁)
인명 미상
작성지역
지역 경기도 화성 (현재주소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작성시기
연도 1800
형태사항
유형묘비문(墓碑文)
크기(cm) 세로 : 35.9, 가로 : 20.4
판본첩장본(帖裝本)
장정1帖 14折
탁본형태습탁(濕拓)
탁본서체 비액 : , 비신 : 해서(楷書)
수량1첩
판식
재질
표기문자한자
인장
개수형태색깔크기(cm)인문
비고
[청구기호]

B14b-44

[건립/중립 연대]

1800년(건립)

소장정보
원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현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정조(正祖)의 건릉지(健陵誌) 탁본.


원자료제목
표제건릉지첩(健陵誌帖)

[내용 및 특징]
1800년 정조의 무덤인 건릉(健陵)을 조성하고 지석(誌石)을 제작하여 매장하기 이전 탁출(拓出)하여 첩장(帖裝)으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첩의 면수는 표지를 제외하고 탁본 면만 29면이고, 한 면은 10행 18자로 되어 있다. 표지의 제첨은 ‘건릉지첩(健陵誌帖)’이다. 표지에 약간의 훼손이 있다.
지문의 내용은 정조가 학문이 높아 왕이며 스승이었음을 언급하고, 이어 왕의 계통에 대해서 밝혔다. 왕의 학습 계제를 기록하고, 어정(御定)의 여러 책들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왕의 궁리격물(窮理格物)과 존심양성(存心養性)에 대한 논으로 ‘태극(太極)’ ‘심성(心性)’ ‘격물치지(格物致知)’ ‘함양성찰지공(涵養省察之工)’ ‘기미(幾微)’ ‘지행(知行)’ ‘근독(謹獨)’ ‘벽사(闢邪)’ ‘이연평정중체인미발지지(李延平靜中體認未發之旨)’ ‘성인지훈(誠仁之訓)’ ‘위치지법(爲治之法)’ ‘문장(文章)’ 등의 개념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이어 왕의 입덕(立德)과 학문을 위한 용공(用工)의 차서(次序)에 대해 설명하였고, 정조의 각종 행실에 대해 언급하였다. 끝으로 정조를 성인(聖人)이라 하였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이다. 그는 도승지로 있을 때 정조가 사망하자 지문을 작성하였다. 누구보다도 정조의 신임을 받았고, 또한 오랜 기간 정조를 가까이 모신 인물이다.
지문의 작성 시기는 지문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정조는 1800년 6월 28일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지문의 제일 끝 부분에 기록된 작성일은 ‘崇禎紀元後三庚申十一月日’로 되어 있고, 지문 2번째 장에서는 정조의 장례일이 11월 6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지문은 1800년 11월 1일에서 5일 사이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윤행임이 지은 정조의 지문은 당시의 실록과 『열성지장통기』에도 실려 있다. 실록에 실려 있는 지문에는 능지에 없는 글자가 있거나 틀린 글자가 간혹 있다. 예를 들어 4번째 장 8행에는 ‘王姓李氏’ 라 되어 있으나 실록에는 ‘王姓李氏 諱祘 字亨運’으로 되어 있다. 『열성지장통기』에 실려 있는 지문에는 많은 글자가 탈락되었거나 혹은 첨가되었으며 오자도 많은 편이다.
피전자 정조의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정조는 타계하기 한 해 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겼고 자신의 저술·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된 것을 보았으며, 1814년에 순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이를 간행하였다.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시호를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고 하였으며,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1900년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황제로 추존하면서 건릉에 세운 표석인 ‘정조선황제건릉비(正祖宣皇帝健陵碑)’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건릉은 봉분 안에 2실을 갖춘 합장릉이다. 봉분을 빙 둘러 12칸의 난간석이 에워싸고 있으며, 난간석의 기둥에는 12지 방위가 문자로 새겨졌다.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봉분 앞에 상석 1좌가 있고, 그 양측에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봉분 바깥쪽으로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과 장명등 1좌가 있으며, 그 아랫단에는 무인석·석마 각 1쌍이 있다. 금관조복을 입고 있는 문인석은 사실적인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 정자각과 1992년 복원한 비각이 있으며, 정자각 남쪽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을 참도(參道)라 하는데 융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까지 참도 좌우 양측에 박석(薄石)을 깔아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2002년 정자각 서쪽에 수라간을 복원하였으며, 능역 남측 대로변에 재실이 있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초반 왕실을 비롯한 국왕의 지석 제작방법과 내용, 탁본과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집필자
성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