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분류 > 고서 > 금석문 > 강화충렬사비기(江華忠烈祠碑記)

UCIG002+JSK+KSM-WH.1701.0000-20170515.B41B46
분류
형식분류고서-금석문
내용분류교육/문화-예술-금석문
소장처유형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인명 김상용(金尙容)
인명 김상길(金尙吉)
인명 심현(沈誢)
인명 이시직(李時稷)
인명 송시영(宋時榮)
인명 구원일(具元一)
인명 윤전(尹烇)
인명 권순장(權順長)
인명 김익겸(金益兼)
인명 황선신(黃善身)
인명 강흥업(姜興業)
인명 권상하(權尙夏)
인명 김진규(金鎭圭)
인명 김진규(金鎭圭)
인명 미상
작성지역
지역 미상 (현재주소 : 미상)
작성시기
연도 1701
형태사항
유형묘갈명(墓碣銘)
크기(cm) 세로 : 34.3, 가로 : 22.7
판본첩장본(帖裝本)
장정
탁본형태습탁(濕拓)
탁본서체 비액 : 전서(篆書), 비신 : 해서(楷書)
수량1첩 32면
판식
재질
표기문자한자
인장
개수형태색깔크기(cm)인문
비고
[청구기호]

B41B-46

[건립/중립 연대]

소장정보
원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현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강화도 충렬사의 묘정에 세운 비석의 탁본첩.


원자료제목
표제강화충렬사비기(江華忠烈祠碑記)

[내용 및 특징]
강화충렬사비는 병자호란에 순국하여 충렬사에 배향된 11분 열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숙종 27년(1701)에 세워졌다. 이전에는 충렬사에 묘정비가 없었으므로 강화유수 김창집(金昌集)이 안타깝게 여겨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비문은 권상하(權尙夏)가 지었고 글씨는 김진규(金鎭圭)가 썼다. 김창집은 충렬사에 주벽(主壁)으로 배향된 김상용의 아우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며, 김진규는 함께 배향된 김익겸(金益兼)의 손자이다. 권상하는 충렬사에 배향된 분들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스스로 존명반청(尊明反淸)을 주장하던 차에 평소에 친분이 있던 김창집이 부탁하였으므로 비문을 찬술하였다.
현재 장서각에는 『강화충렬사비기』 탁본첩 1점이 소장되어 있다. 표지는 사만자문(斜卍字紋)이 찍힌 황색 지의(紙衣)로 만들었으며, 책등 부분은 표지와 다른 종이로 쌌다. 제첨은 없고 표지 왼쪽 상단에 예서로 “충렬사비(忠烈祠碑)”라고 묵서하여 표제를 삼았다. 뒷표지의 오른쪽 상단에는 전서로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라고 씌어 있다. 앞표지의 안쪽 면과 그 다음 면에는 예서 대자로 “한와진척(漢瓦秦尺)”이 각 면에 2자씩 씌어 있고, “척(尺)”字 왼편에는 “순도이신(順道貽身)”이 예서로 씌어 있다. 또한 “한와(漢瓦)”의 왼편 아래에는 음각으로 팔각형의 면에 새겨진 “하석규인(河錫奎印)”이, “이신(貽身)”의 오른편에는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지만 타원형의 면에 양각으로 새겨진 인장이 각각 인주로 찍혀 있다.
탁본은 원래의 것을 오려 재편집하여 모두 32면이 되도록 표구하였다. 첫 3면은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라고 전서 대자로 씌여진 제액이 1면에 2자씩 나뉘어 있고, 남은 29면에는 예서 소자로 씌여진 음기가 나뉘어 있다. 음기의 각 면은 4행 8자를 기준으로 균일하게 배열되었으며 대두 없이 격자만 지켰으나, 찬서자의 이름과 비석을 세운 날을 기록한 부분은 1자를 내려 쓰고 대두와 격자를 모두 지켰다. 탁면은 오금을 먹이지 않은 원탁이며 자료의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강화충렬사비기』의 음기는 시종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문장으로 씌어 있다. 먼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군신들이 피난하고, 관직에 있던 금경징․이민구․장신이 책임을 버리고 달아나 강화도가 함락되는 긴박한 상황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충렬사에 배향된 열사 11분의 장렬한 최후를 서술하여 앞 단락과 대비를 이루었다. 다음 단락에서는 열사에 대한 증시와 증직, 충렬사의 건립과 열사의 배향 등 조정의 포상을 열거하였다. 그리고 열사들의 순절이 갖는 가치를 높이 평가한 뒤, 비석 건립과 기문 찬술의 시말을 말하였다. 이 비문은 권상하의 『한수재집』권25에 "강화충렬사정비"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강화 충렬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번지에 있는 사당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병자호란과 신미양요 때 순절한 충신 29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본래 인조 20년(1642)에 경향(京鄕) 유림(儒林)들이 발의하여 김상용이 젊은 시절에 살던 선원촌(仙源村)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충현사(顯忠祠)라고 명명하였다가 효종 9년(1658)에 강화유수 허휘(許徽)가 효종에게서 사액을 받아 충렬사로 이름을 바꿨다. 처음 현충사를 세울 때 김상용, 이상길, 심현, 이시직, 송시영, 구원일 6분을 배향하였고, 효종 때에 윤전, 권순장, 김익겸, 황선신, 강흥업 5분을 추가배향하였다.
이 11분의 장렬한 최후는 "강화충렬사비기" 외에 이이명(李頤命)의 "청사제충렬사급사난인소(請賜祭忠烈祠及死難人疏)"(『소재집(疎齋集)』권4)에도 실려 있다. 이이명은 별도로 구원일, 황선신, 강흥업 3분의 행적을 "강도삼충전(江都三忠傳)"(『소재집』권11)에 기록하고 찬양하였다. 이후 홍명형, 이돈오, 홍익한, 윤계, 윤집, 황일호 등을 계속 배향하였고,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어재순 제를 추가 배향하였다. 충렬사는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도 충렬사와 그 배향 인물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 사원(祠院) 조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26권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강도사절(江都死節) 조, 같은 책 별집 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그리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강화부읍지(江華府邑誌)』(奎 10742)를 참고할 만하다. 김진규의 "강도진폐소(江都陳弊䟽)"(『죽천집(竹泉集)』권28)과 임방(任埅)의 "강화충렬사강당중건상량문(江華忠烈祠講堂重建上樑文)"(『수촌집』권9) 또한 이것과 관련된 자료이다.
비문의 찬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본관은 안동,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 또는 한수재(寒水齋)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아버지는 숙의(執義) 권격(權格)이며, 우참찬(右參贊) 권상유(權尙游)의 형이다. 송시렬과 송준길을 스승으로 학문을 배웠으며, 당쟁이 치열한 정치 상황 속에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송시열이 죽은 뒤 그 유언에 따라 만동묘를 청주에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배향하였고,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을 세웠다.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이이의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다.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이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으로 논쟁하자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문집에 『한수재집(寒水齋集)』․『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비문의 글씨를 쓴 김진규(金鎭圭, 1658~1716)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이다. 영돈녕부사 김만기(金萬基)의 아들이며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이다. 노론으로 송시렬의 문인이며 벼슬은 대제학, 공조판서, 좌참찬 등을 지냈다. 문장, 글씨, 그림에 능했다. 저서로 『죽천집(竹泉集)』이 있으며 편서로 『려문집성(儷文集成)』이 있고, 글씨는 『강화충렬사비』 외에 『대사헌심의겸비(大司憲沈義謙碑)』·『증지평이령비(贈持平李翎碑)』 등이 유명하다.
[자료적 가치]
병자호란 때의 열사에 대한 후대의 추존상황을 볼 수 있고, 당시 존명반청(尊明反淸) 의식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江華府邑誌』(奎 10742), 『夢窩集』, 『疎齋集』, 『寒水齋集』, 『竹泉集』, 『水村集』 / /
집필자
성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