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분류 > 고문서 > 1407년 정전(鄭悛) 조사첩(朝謝牒)

UCIG002+JSK+KSM-XA.1407.1110-20100615.B013023004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교령류-고신
내용분류 정치/행정-임면-조사첩
소장처 문중-거창 초계정씨 동계종택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수취인
신분 직예문관(直藝文館)
인명 정전 (鄭悛)
본관 초계(草溪)
생년 1356
몰년 1435
참조UCI G002+AKS-KHF_12C815C804FFFFU9999X0
설명 정전은 1377년(洪武丁巳:禑王3)에 진사 장원에 입격하였고, 1382년(壬戌:禑王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公州通判, 西海․楊廣․江原經歷, 原州敎授을 지냈다. 1403년(태조 3)에 聖節使 書狀官으로 배를 타고 남경에 다녀왔다. 송도에 돌아와 左獻納知製敎, 외직으로 慶尙道經歷을 지냈다. 내직으로 直禮文官兼直講, 平壤敎授을 지냈다. 1407년(태종 7)에는 謝恩使 書狀官 으로 중국을 다녀왔다. 1413년(태종 13)에 左司諫大夫, 成均館大司成, 集賢殿直提學등을 역임하였다. 1423년(세종 5)에는 嘉善大夫檢校漢城府尹寶文閣提學을 지냈다. 세종시 68세 때에 함양에 돌아와서는 文章行誼로서 ‘八溪先生’이라 칭해졌다. 1435년(세종 17)에 80세로 사망하였다. 정전의 글은 『八溪世芳集』에 전한다. 초배는 高靈朴氏로 軍器少尹 邦龍의 딸이다. 계배는 河東鄭氏로 判典農寺事 竹堂 鄭復周의 딸이다.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발급
단체/기관명 이조
담당자 판사(判事)
작성지역
지역 한성 (현재주소 :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연도 1407
월일 12/08 (음)
정보원표기 영락5년12월18일
형태사항
크기(cm) 세로 : 45, 가로 : 51
판본 필사본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인장
개수 형태 색깔 크기(cm) 인문
1 방형 적색 吏曹之印
서명(개)
착명 서압 수촌 수장 착관 기타
4
비고

영인정보 : 『古文書集成 23 : 居昌 草溪鄭氏篇』(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5)

『古文書集成 80 : 居昌 草溪鄭氏篇(正書本)』(韓國精神文化硏究院, 2005)

소장정보
원소장처 초계정씨 동계종택 (현재주소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 1707년 이조가 태종의 명으로 정전을 직예문관으로 임명하는 문서

1707년 1월 18일에 태종의 명령으로 직예문관으로 임명되는 정전을 조사를 마치고 관문을 보냈기에 고첩을 보내기에 합당하다는 문서이다.
집필자
1차 집필자 : 성봉현

1407년 吏曹가 太宗의 명으로 鄭悛을 直藝文館으로 임명하는 문서


[내용 및 특징]
吏曹의 朝謝는 司憲府吏房書吏姜屳永樂 5년(1407) 12월 18일에 1407년 12월 8일의 關文에 따른 일로 임금의 명령으로 鄭悛을 直藝文館으로 朝謝를 마치고 관문을 보냈기에 故牒을 보내기에 합당하다는 문서이다.
[자료적 가치]
鄭悛(1356-1435)의 임명문서는 총 5건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교지는 2건으로 영락 원년(1403)영락 5년(1407)의 것이다. 그리고 조사첩이 3건으로 영락 1년(1403), 영락 2년(1404), 영락 5년(1407)의 것이다.
鄭悛의 교지와 조사첩은 조선초기 『경국대전』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의 5품 이하 관원을 임면하는 문서형식을 보여 준다. 이러한 문서형식은 조선초기에 성립된 것으로 故牒․下帖․平關 이라 하였는데 세조 12년 이후 부터는 『경국대전』의 체제로 변화 하였다. 조선초기 관리 임명 문서형식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고려열조등과목록』
  • 「고려후기와 조선초기의 인사문서 연구」 / 박준호 / 『고문서연구』 31, 2007.8
  • 『古文書集成 23:居昌草溪鄭氏篇』 解題 / 韓國學中央硏究院,1995
  • 「조선후기 籍沒 ‘位土’ 회복과정-居昌 草溪鄭氏 고문서를 중심으로-」 / 김성갑 / 『고문서연구』 28, 한국고문서학회, 2006
집필자
1차 집필자 : 성봉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