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분류 > 고서 > 등록 > 경기전영정후면가배등록(慶基殿影幀後面加褙謄錄)

UCIG002+JSK+KSM-WR.1764.1111-20140415.K22752
분류
형식분류고서-등록
내용분류국왕/왕실-의례-등록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편찬
단체/기관명 예조
작성지역
지역 한성부 (현재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작성시기
연도 1764년
형태사항
크기(cm) 세로 : 41.6, 가로 : 28.6
판본필사(筆寫)
장정선장(線裝)
수량1책 18장
판식사주단변(四周單邊), 반엽(半葉) 11행 27자,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재질저지(楮紙)
표기문자한자, 이두
인장
개수형태색깔크기(cm)인문
방형붉은색全羅道監司監營之印
서명(개)
착명서압수촌수장착관기타
2
비고
[청구기호]

K2-2752

[마이크로필름]

MF 35-635

소장정보
현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 경기전영정후면가배등록(慶基殿影幀後面加褙謄錄)

건륭 29년(영조 40, 1764) 2월 경기전에 봉안된 조선 태조 영정의 후면을 도배하는 작업에 관한 제반 사항을 예조에서 정리해놓은 등록이다. 「좌목(座目)」은 책임자인 예조판서 서명응부터 차사원, 감조관, 각 장인과 고지기, 차사(差使)까지 참여자 전체의 명단이다. 「계사(啓辭)와 이문(移文)」은 영조 38년에 시작하여 동왕 40년에 마친 경기전 태조 영정의 후배와 전각 수리에 관한 계사와 각종 관련 문서를 날짜순으로 정리해놓았다.
[용어 해설]

관련문헌
『慶基殿影幀後面加褙謄錄』(K2-2752)
집필자
임민혁

■ 좌목(座目)

책임자인 예조판서 서명응부터 차사원, 감조관, 각 장인과 고지기, 차사(差使)까지 참여자 전체의 명단이다.
[용어 해설]

관련문헌
『慶基殿影幀後面加褙謄錄』(K2-2752)
집필자
임민혁

■ 계사(啓辭)와 이문(移文)

영조 38년에 시작하여 동왕 40년에 마친 경기전 태조 영정의 후배와 전각 수리에 관한 계사와 각종 관련 문서를 날짜순으로 정리해놓았다.
임오(영조 38년) 7월 25일 : 영정의 전면에서 오른쪽 눈 아래, 왼쪽 눈 아래, 오른쪽 귀 아래에 각각 한 곳이 부풀어 올라와 있으며 뒷면에 좀이 슬은 곳이 있다는 사실에, 세 차례에 걸쳐 봉심하고서 이를 보고한 전라감사 원경순의 장계.
임술(영조 18년, 1742) 8월 초3일 : 알릉(謁陵) 후 예조판서는 장수(匠手)를 거느리고 내려가서 경기전을 봉심하고 오라고 함.
계미(영조 39년) 9월 26일 : 예조판서가 봉심하고서 돌아가는 길이라고 서계함.
10월 초4일 : 탈이 있는 곳을 봉심한 즉, 좌우 눈 위 각 1곳, 눈썹 우변 1곳, 좌우 뺨 위 각 1곳, 왼쪽 귓구멍 아래 1곳, 좌우 귓바퀴 각 1곳, 오른쪽 턱 가 1곳, 좌우 입술 아래 각 1곳이 점흔이 있고, 오른쪽 눈 위 2곳, 좌우 눈 아래 각 1곳, 눈썹 양 사이 1곳, 오른쪽 뺨 위 1곳, 왼쪽 귓바퀴 2곳, 왼쪽 귀밑머리 가 1곳이 들뜨고, 후면은 눈썹 양 사이 1곳, 왼쪽 이마 위 2곳, 오른쪽 귓구멍 아래 3곳, 오른쪽 뺨 가 2곳, 왼쪽 입술 위 1곳이 새로 탈이 났으며, 용포와 어탑 및 그 외의 상하좌우가 상흔이 많고 상하 회장(繪粧) 곳곳이 상흔이 있으며 후면에 새로 좀이 슬었으니, 대신에게 물을 것.
초6일 : 후면의 좀이 슬은 곳은 사체가 중대해 전면 가배해야 할 듯하니, 후면 전면 가배는 겨울철을 지나 중춘을 기다렸다가 대광초(大廣綃)로 거행하되, 상방에서 미리 직조하여 대령할 것.
10월 : 영정의 장광척수는 경기전지(誌)를 상고하여 베껴서 올려보내고, 임술년 수개 때 거행한 사례를 한 통 성책에 보내며, 광직에 들어가는 것은 미리 준비하라고 상의원에 알릴 것.
갑신(영조 40년) 정월 11일 : 수개 길일의 추택과 선고사유제․이환안제의 거행, 잡물의 준비, 예조 당상이 기일 전에 내려가 도신과 함께 감독하여 역을 마치겠다는 계사.
14일 : 예조 당상이 내려가는 바, 들어가는 물력을 미리 준비해 대령할 것.
23일 : 가배에 쓸 교농(膠濃)은 외읍에서 준비하는 것이 품질이 좋지 않을 염려가 있으니, 전례대로 호조에서 준비하여 내려보낼 것.
같은 날 : 가배 때 사용하는 배판(褙板)과 배쇄기(褙曬機) 등 나무는 사적인 소나무밭에서 구할 수 없어 좌우 수영(水營)에서 관장하는 봉산(封山)에서 가져다 써야 하되, 운송의 편리를 위해 부안에 있는 변산 소나무밭에 있는 것을 보낼 것이며, 송판과 소나무의 장광척수를 후록함.
2월 초1일 : 경기전을 다시 봉심하여 확인된 정전 및 정자각의 비가 새는 곳과 박락된 곳 등을 영정 가배의 이․환안제 때 동시에 수개하겠다고 함.
초8일 : 이환안제 향축이 내려왔으나 예조 관문이 없고 축문 중에 두연(蠹捐)의 연 자를 손(損)자로 잘못 쓴 것에 대해, 관문은 계수주인(界首主人)을 통해 내려보냈으며 오기는 예문관관원을 추고하고 고쳐 써서 내려보낸 후에 전의 축문은 향실의 정결처에서 불에 태워버릴 것이라고 함.
2월 : 교농에 들어가는 사향(麝香)과 용뇌(龍腦)는 각 2전씩 보내고 그 나머지 물종은 임술년 전례에 없었으니 상세히 물어서 회이하라고 함.
2월 : 후배에 들어가는 모면지(毛面紙) 10장과 사향 3전, 용뇌 2전을 추가하여 보낼 것.
16일 : 들뜬 부분과 회장(繪粧) 등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17일 : 배접장은 내려갔으며, 약호(藥糊)의 신법에 가짜 사향과 용뇌를 사용하게 될 경우의 폐해가 염려되니 소홀함이 없도록 거행 상황을 즉시 회이하라고 함.
2월 : 대광초를 좋은 것으로 준비해 직조해서 보냈다고 함.
25일 : 예조참판 서명응 등이 치재부터 시배(始褙), 시역까지 했다는 진행상황을 보고하는 계사.
같은 날 : 신초(新綃)의 장광과 상하 옥축(玉軸), 신초와 회장 상접(相接)에 관한 하교에 대해,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외(外)회장의 처리 문제를 미처 품정하지 못했다면서 하교를 청함.
27일 : 영정 후면은 상하 옥축까지 전면 가배하였고 향수로 씻고 윤기 나게 했으며 곤포와 어탑 등 모든 색채에 상흔을 없앴다고 하고, 후면의 상회장을 정탈해서 하교가 내려진 후에 전각에 환안할 생각이라는 계사.
3월 초2일 : 구 회장의 위에 구해둔 단(緞)으로 그 위에 가배한 것은 대죄하지 말라고 함.
같은 날 : 유지(有旨)를 전주부에서 공경히 받았다고 함.
3월 초3일 : 유지를 받든 즉시 남색운문단으로 외회장을 하고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환안하고서 봉심하고 전각 내의 수리도 다 마치고 환안제를 설행하고서 복명차 발행하였다고 하는 계사. 후배와 수개 제 현황.
[용어 해설]

관련문헌
『慶基殿影幀後面加褙謄錄』(K2-2752)
집필자
임민혁

영조 39년인 1763년 7월 25일부터 다음해인 1764년 2월까지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보수하였던 전체과정을 예조에서 기록한 등록이다.


원자료제목
표제경기전영정가배등록(慶基殿影幀加褙謄錄)
내제건륭이십구년이월일경기전영정후면가배등록(乾隆二十九年二月日慶基殿影幀後面加褙謄錄)

[내용 및 특징]
이 등록은 영조 39년인 1763년 7월 25일부터 다음해인 1764년 2월까지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보수하였던 전체과정을 예조에 기록해 놓은 자료이다. 표제는 “경기전영정가배등록(慶基殿影幀加褙謄錄)”이라고 되어 있으나 권수제는 “건륭이십구년이월일경기전영정후면가배등록(乾隆二十九年二月日慶基殿影幀後面加褙謄錄)”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등록은 보수 작업이 마무리된 1764년에 전체작업과정을 종합적으로 작성한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구성을 보면 먼저 이 작업에 참여한 관원들과 장인들의 명단이 나온다. 그 다음에 어진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상부에 알리는 보고 단계, 훼손 상태를 살펴보는 점검 단계, 어떻게 보수할지에 대한 논의 단계, 구체적인 보수작업 단계가 이어진다. 그리고 보수작업에 들어간 물품들의 목록과 수량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다음, 마지막으로 이 공사를 총감독한 예조당상과 전라감사가 싸인을 하고 있다.
이 보수작업은 예조참판 서명응(徐命膺)과 전라감사 심이지(沈履之)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전주판관, 김제군수, 금산군수, 경기전 참봉 등이 참여하고 있다. 배접장으로는 내수사(內需司) 소속 김익서(金益瑞)와 김삼휘(金三輝)가 차출되었다. 내수사는 이조 소속으로 궁중의 쌀, 옷감, 잡물, 노비 등을 관장하였던 관청이다. 이참에 경기전 내외에 대한 보수공사도 진행되고 있는데, 이에 참여한 관원과 장인들의 명단도 나열되어 있다.
경기전은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다. 태종은 그의 아버지 태조 어진을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등에 봉안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거나 유실된 것이 많았는데, 전주 경기전과 영흥 준원전의 영정은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이 당시까지 근 300년 동안 보존되어 온 것이었다. 특히 경기전 어진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7년 10월 4일부터 1599년 7월 25일까지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졌던 사연이 있었다. 따라서 경기전 어진은 건국 시조의 영정이라는 점에서 신성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새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태종 당시에 그려진 것이 그대로 전승되었다는 점에서 영조 또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경기전 참봉인 신경일(申敬日)이 경기전 어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전라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영정의 오른쪽 눈 아래, 왼쪽 눈 아래, 오른쪽 귀 아래가 각각 부풀어 올랐고 뒷면에 좀 슬은 데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전라감사는 전주판관과 경기전 참봉을 대동하여 3차례에 걸쳐 영정을 점검한 후 그 결과를 1763년 7월 25일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러자 영조는 8월 3일 예조판서가 직접 경기전에 내려가 살펴보고 오라는 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예조판서 구윤명(具允明)은 경기전에 내려가 어진을 살펴본 후 10월 4일 그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영조는 10월 6일 주강(晝講)에서 대신들과 함께 경기전 태조 어진 보수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영정 앞면을 보수하는 것은 잘못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므로 뒷면만을 새롭게 배접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실제 보수작업 단계에서는 어떤 기술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그중 풀의 제조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밖에 사용되었던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구체적인 작업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등록은 어진 보수에 관한 구체적 과정과 소요 물품들을 기록해 놓고 있어 당시 작업 시스템과 기술 및 재료들을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주기사항
현재 장서각에는 어진 보수와 관련하여 이 등록 외에 『영정보수도감등록(影幀補修都監謄錄)』(2-2769), 『영정보수등록(影幀補修謄錄)』(2-2771) 등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장서각소장등록류해제』 / 국학진흥사업추진위원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집필자
1차 집필자 : 김혁, 2차 집필자 : 김방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