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분류 > 고서 > 일기 > 간양록(看羊錄)

UCIG002+JSK+KSM-WM.1597.1111-20130515.B15ID7
분류
형식분류고서-일기
내용분류개인-생활-일기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찬자
본관 진주(晉州)
생년 1567
몰년 1618
작성지역
지역 한성 (현재주소 : 서울)
작성시기
연도 1597
정보원표기 정유
형태사항
크기(cm) 세로 : 34.5cm, 가로 : 23㎝
판본필사(筆寫)
장정선장(線裝)
수량1冊 21張
판식大淸嘉慶十年時憲曆紙
재질종이
표기문자한자
인장
개수형태색깔크기(cm)인문
1정방형적색5.2×5.2cm韓國精神文化硏究院藏書印
비고
[청구기호]

B15ID-7

[마이크로필름]

MF35-10403

[기록시기]

1597~1601

소장정보
원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현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 간양록(看羊錄)

『간양록(看羊錄)󰡕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姜沆)의 3년 간 일본 생활을 기록한 일기로 적국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견문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장서각 소장 『간양록󰡕은 K2-4523본과 B15ID-7본 두 종류가 있다.
B15ID-7본은 K2-4523본과 비교하여 서발문과 지도가 빠져 있고 「고부인격(告俘人檄)」과 「섭란사적(涉亂事迹)」장이 없는 대신 그의 문집에 실린 「정요동지휘사문(呈遼東指揮使文)」, 「정중조차관문(呈中朝差官文)」, 「의예조답마도문(依禮曹答馬島文)」이 첨부되어 있어 구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필사 시기는 1812년 이후로 추정된다.
『간양록󰡕은 저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동안 일본의 사정을 기록하여 본국에 보고한 것으로 그 내용이 사실적이고 생동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간양록󰡕의 핵심을 이루는 「적중봉소(賊中封疏)」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은 일본의 역사와 지리․인물․풍속․관제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일본의 형세와 우리나라 국방 대책을 서로 비교하며 저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어 당대의 전란자료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포로의 신세로 일본에서 교유한 인물들이 후에 일본 주자학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에서 전란의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양국 문화교류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문헌
『睡隱集󰡕 『睡隱看羊錄󰡕
집필자
박진성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의 3년 간 일본 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원자료제목
표제看羊錄 乙丑三書
내제看羊錄

[내용 및 특징]
『간양록(看羊錄)󰡕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姜沆)의 3년 간 일본 생활을 기록한 일기다.
‘간양(看羊)’은 흉노에 포로로 잡혀갔던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다. 본래 『간양록(看羊錄)󰡕의 제목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으나, 1656년(효종 7) 저자의 문집이 간행될 때 강항의 애국충절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간양(看羊)’으로 고친 것이다.
저자 강항(姜沆, 1567~1618)의 자는 태초(太初)고, 호는 수은(睡隱)이며 본관은 진주(晉州)다. 전라도 영광(靈光) 출신으로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이며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강항은 1593년 전주 별시 문과(全州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分戶曹參判)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인을 모으기도 했다. 영광이 함락되자 9월에 왜군의 노략을 피해 바닷길로 피난을 가다가 왜군을 만나 포로가 되어 결국 일본으로 끌려가 伊豫州오쓰성[大津城]에 갇히게 되었다. 1598년 6월 오사카성[大阪城]을 거처 7월 다시 교토후시미성[伏見城]으로 옮겨졌는데, 이곳에서 승려 舜首座와 왜장(倭將) 아카마쓰히로미치[赤松廣通]을 사귀게 되었고 그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1600년 5월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602년 조정에서는 승의랑대구교수(承議郞大丘敎授)를 제수하였고, 1608년에는 순천교수(順天敎授)를 임명하였으나, 적진에서 자진(自盡)하지 않은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이에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1618년 5월 6일에 생을 마쳤다.
이 책의 판본은 목판본과 필사본, 영인본 등이 있다. 현재 장서각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고 있으며 『간양록(看羊錄)󰡕, 『수은간양록(睡隱看羊錄)󰡕, 『수은선생간양록(睡隱先生看羊錄)󰡕 등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또 1657년 간행된 저자의 문집 『수은집(睡隱集)󰡕 4책 가운데에도 「간양록」이 실려 있다. 문집과 별도로 간행된 『간양록󰡕의 간행 시기는 1760년 간행된 『영호열읍소재책판목록(嶺湖列邑所在冊板目錄)󰡕에 나타나고 있어 그 이전일 것으로 여겨진다.
장서각 소장 『간양록󰡕은 K2-4523본과 B15ID-7본 두 종류가 있다. 두 본 모두 필사본이다. B15ID-7본은 1책 21장에 표제는 ‘看羊錄 乙丑三書’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한 면에 18항이며 자수는 불규칙하다. 책의 앞에 ‘大淸嘉慶十年歲次乙丑內用三書’라 하고 내용에 달의 대소(大小)를 밝히고 있으며, 일길(日吉)⋅천덕(天德)⋅월덕(月德) 등의 날짜 및 연신방위지도(年神方位之圖)를 수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청 가경(嘉慶) 10년인 1805년에 조선에서 간행한 역서(曆書)를 활용하여 필사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3번째 장부터 ‘姜睡隱名沆 看羊錄’이란 제목을 밝히고 내용을 시작하였다.
K2-4523본과 비교하여 서발문과 지도가 빠져 있고 「고부인격(告俘人檄)」과 「섭란사적(涉亂事迹)」장은 없다. 「적중봉소(賊中封疏)」,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의 앞부분이 생략되어 있기도 하며, 특히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장에서는 본문 상단 여백에 일본의 인물과 지명 등을 한글로 표기하였다. 또한 그의 문집에 실린 「정요동지휘사문(呈遼東指揮使文)」, 「정중조차관문(呈中朝差官文)」, 「의예조답마도문(依禮曹答馬島文)」을 첨부하여 그 구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필사 시기는 책의 마지막 장에 ‘壬申春書’라 쓰여 있는 점으로 보아 1805년 이후의 임신년(壬申年)인 1812년 이후로 추정된다.
「정요동지휘사문(呈遼東指揮使文)」의 내용은, 절강(浙江)의 총병(總兵)이 명나라 조정에 알리기를, 조선이 왜적과 내통하여 지금 전라도와 경상도지방에 왜적들이 섞여 있다고 하자, 요동어사(遼東御使) 양씨(楊氏)가 지휘사(指揮使)를 보내 조선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상황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이에 강항이 지휘사에게 왜란 이후 일본은 조선의 원수이며 조선은 결코 그들과 내통한 일이 없다고 말하였다.
「정중조차관문(呈中朝差官文)」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왜인이 조선의 전라 경상지방에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명나라차관(差官)이 파견되어 오자 조선이 왜적과 내통하여 전라․경상지방에 왜적이 섞여 있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음을 고하였다.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처럼 섬기고 있으며 왜적은 원수로 여기고 있으므로 조선에 대한 의심을 거둘 것을 부탁하고 있다.
「의예조답마도문(依禮曹答馬島文)」은 1601년 상국(相國) 이덕형(李德馨)이 지휘하는 영남의 군영에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사신이 왔을 때, 상국의 명에 의해 일본의 사신에게 답한 글이다. 그 이전까지의 우호적인 관계를 저버리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대마도의 군사가 조선을 침략하는 선봉이 되었던 것을 비난하였으며, 이제 와서 화친과 통상을 바라는 일본에 그럴 필요 없다는 거부의 뜻을 전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간양록(看羊錄)󰡕은 저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동안 일본의 사정을 기록하여 본국에 보고한 것으로 그 내용이 사실적이고 생동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간양록󰡕의 핵심을 이루는 「적중봉소(賊中封疏)」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은 일본의 역사와 지리․인물․풍속․관제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일본의 형세와 우리나라 국방 대책을 서로 비교하며 저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어 당대의 전란자료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교유한 후지와라세이카[藤原醒窩]아카마쓰히로미치[赤松廣通] 같은 인물들에게 조선의 과거(科擧) 및 예제(禮制)를 가르쳤는데 그들이 이 가르침을 실행하여 훗날 일본 주자학(朱子學)의 시조가 된 점에서 강항은 일본 주자학(朱子學)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주목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간양록󰡕은 전란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양국 문화교류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
  • 『承政院日記󰡕
  • 『睡隱集󰡕
  • 「壬辰倭亂後의 對日本認識」 / 정장식 / 『일본문화학보󰡕 4호, 한국일본문화학회, 1998
  • 「『看羊錄』연구 : 사실 제시와 체험의 형상화」 / 임치균 / 『정신문화연구󰡕 24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1
  • 「한국사상사학(韓國思想史學) :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일본인식」 / 방기철 / 『한국사상과 문화󰡕 57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
집필자
1차 집필자: 안미경, 2차 집필자: 박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