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분류 > 고서 > 일기 > 갑신일록략초(甲申日錄略抄)

UCIG002+JSK+KSM-WM.1881.1100-20140415.K20155
분류
형식분류고서-일기
내용분류개인-생활-일기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찬자
본관 안동(安東)
생년 1851
몰년 1894
작성지역
지역 서울 (현재주소 : 서울)
작성시기
연도 1881
월일 12/00
정보원표기 신사 12월
형태사항
크기(cm) 세로 : 27cm, 가로 : 19.6cm
판본필사본(筆寫本)
장정선장(線裝)
수량1冊 55張
판식四周雙邊 半郭 22.5 × 15.6cm, 烏絲欄, 半葉 10行 20字, 上黑魚尾
재질종이
표기문자한자
인장
개수형태색깔크기(cm)인문
1정방형적색4.4 × 4.4李王家圖書之章
비고
[청구기호]

K2-0155

[마이크로필름]

MF35-856

[기록시기]

1881.12.00.~1884.12.06.

소장정보
원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현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번지)

■ 갑신일록략초(甲申日錄略抄)

이 일기는 1881년(고종 18) 12월부터 1884년(고종 21) 12월 6일까지 약 3년간의 기록으로,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전말을 기록한 『갑신일록(甲申日錄)』의 의 주요 내용을 뽑아 정서한 초본(抄本)이다. 이 일기는 본래 김옥균에 의해 지어졌고, 1900년경에 이왕직실록편찬회(李王職實錄編纂會)에 의해 정서된 것이다.
이 자료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이 직접 남긴 자료로, 당시 정변을 전후한 조선의 사정을 기록한 국내외의 어느 기록보다 구체적인 자료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김옥균 개인에 대한 연구에도 유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집필자
1차 집필자 : 허원영, 2차 집필자 : 권석창

1881년(고종 18) 12월부터 1884년(고종 21) 12월 6일까지 약 3년간의 기록으로,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전말을 기록한 『갑신일록(甲申日錄)』의 주요 내용을 뽑아 정서한 초본(抄本)이다.


원자료제목
표제甲申日錄 全

[내용 및 특징]
이 일기는 1881년(고종 18) 12월부터 1884년(고종 21) 12월 6일까지 약 3년간의 기록으로,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전말을 기록한 『갑신일록(甲申日錄)』의 주요 내용을 뽑아 정서한 초본(抄本)이다. 이 일기는 본래 김옥균에 의해 지어졌고, 1900년경에 이왕직실록편찬회(李王職實錄編纂會)에 의해 정서된 것이다. 현재까지는 원래 저본인 『갑신일록』 원본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일기의 작성자인 <인명>김옥균</인명>은 <나라명>조선</나라명> 말기의 정치가로, 본관은 <지명>안동(安東)</지명>, 자(字)는 백온(伯溫), 호(號)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 시호(諡號)는 충달(忠達)이다. 아버지는 <인명>김병태(金炳台)</인명>, 어머니는 영광(靈光) 송씨(宋氏)로, 7세 때 당숙 <인명>김병기(金炳基)</인명>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했다. 1872년(고종 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명>옥당승지(玉堂承旨)·정언(正言)</관직명>을 거쳐 <관직명>호조참판(戶曹參判)</관직명>에 이르렀다. <인명>박규수(朴珪壽)·유대치(劉大致)·오경석(吳慶錫)</인명>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81년 <나라명>일본(日本)</나라명>을 시찰하고 돌아온 데 이어, 이듬해 다시 <관직명>수신사(修信使)</관직명> <인명>박영효(朴泳孝)</인명> 일행의 고문으로 <나라명>일본</나라명>에 다녀온 후, <인명>박영효·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인명> 등과 나라의 개혁방안을 의논하고, 1884년 다시 일본에 가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원의 차관을 교섭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나라명>청(淸)</나라명>의 세력에 기대어 지나치게 수구적인 정치를 펴는 민씨일파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1884년 12월 <관청명>우정총국(郵征總局)</관청명> 낙성연(落成宴)을 기회로 <인명>박영효·홍영식</인명>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수구파(守舊派) 거두들을 제거하고 신정부를 조직하여 <관직명>호조참판</관직명> 겸 <관직명>혜상공국당상(惠商公局堂上)</관직명>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명>청</나라명> 주둔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일본으로 망명, <인명>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인명>로 이름을 바꾸고는 10년간 일본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 후 오랜 뜻을 이루기 위해 <나라명>청</나라명>나라의 <인명>이홍장(李鴻章)</인명>을 만나 도움을 청하려고 <지명>상해(上海)</지명>로 건너갔다가, 본국정부에서 보낸 자객 <인명>홍종우(洪鍾宇)</인명>에게 1894년(고종 31) 12월 4일 살해되었다. 유해는 본국으로 옮겨져서 <지명>양화진(楊花津)</지명>에서 시체를 찢는 극형에 처해졌으나, 이듬해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관직명>법무대신(法務大臣)</관직명> <인명>서광범</인명>과 <관직명>총리대신(總理大臣)</관직명> <인명>김홍집(金弘集, 1842~1896)</인명>의 상소로 반역죄가 씻기고, 1910년 <관청명>규장각(奎章閣)</관청명> <관직명>대제학(大提學)</관직명>에 추증(追贈)되었다.
이 일기는 1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필사에는 가로 10행 세로 20자 총 200칸의 이왕직실록편찬용지(李王職實錄編纂用紙)가 사용되었다. 이 용지의 첫 행 4번째칸에는 ‘年’, 10번째칸에는 ‘日’이란 글이 인쇄되어 있다. 책 표지의 왼쪽에 ‘甲申日錄 全’라는 표제를 적어놓았고, 본문 첫머리는 ‘甲申日錄略抄 金玉均著’로 시작된다. 표지의 배면에는 「李王家圖書之章」이 찍혀있다.
일기의 구조는 서론에 해당하는 회상형식의 전반부와 본격적인 일기체 형식의 후반부로 구성되어있다. 전반부는 1881년 12월 국왕의 명령으로 김옥균이 제1차로 일본을 방문한 일, 민씨척족(閔氏戚族)이 중심이 된 보수세력과 당오전(當五錢)의 주조(鑄造)를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 등 정변을 본격적으로 모의한 1884년 10월까지의 개화파의 활약과 국내외 정세를 기록하였다. 본문에 해당하는 후반부는 1884년 10월 30일, 김홍집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일본공사(日本公使)다케조에[竹添進一郞]를 만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후 정변의 모의, 인적 구성, 진행, 정책 그리고 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하고 정변에 참가한 사람들이 서울을 탈출한 1884년 12월 6일까지 38일간의 사건을 계속하여 수록하였다.
김옥균『갑신일록』을 저술한 시기는 「조야신문(朝野新聞)」1885년 9월 5일 기사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은 김옥균이 일본에 도망와서 ‘요코하마[橫濱]·고베[神戶] 등지에 유우(流寓)하였지만 요사이는 긴자[銀座] 부근에 우거(寓居)하여 전혀 내객(來客)을 사절하고 붓을 유창(幽窓) 밑에서 농(弄)하면서 지금까지 겪은 기구(岐嶇)한 일들을 저술(著述)하고 있다는 소식, 완성되면 반드시 새로운 사실도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김옥균은 1885년 9월 이전에 칩거하면서 저술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정변 후 1년이 지난 시기에 저술하였기 때문에 음력과 양력의 혼용으로 인하여 날짜가 잘못된 곳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같은 시기의 기록인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등과의 비교를 통해 교정이 가능하다.
이 일기를 저술한 동기는 김옥균이 정변의 주도자로서 정변의 전말을 기록할 책임감과 일본 정부의 배신적 행동에 대한 규탄에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다분히 타인의 열람을 의식하여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저술하였으며, 활자화하여 발표할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현되지 않은 채 사본의 형식으로 전파되었다.
『갑신일록』의 필사본은 장서각 소장본 외에도 다수가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所藏)의 『김고균갑신일록(金古筠甲申日錄)』(위창古216-2), 규장각 소장의 『갑신일록』(古4280-3),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의 『갑신일록』(951.0543-G424gf), 경희대학교 소장의 『갑신목록(甲申目錄)』(G 951.59 김65ㄱ), 이선근(李瑄根) 박사 개인소장본 등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오세창(吳世昌, 1864~1853)이 기증한 것으로 현재 위창문고(葦滄文庫)에 분류·소장되어 있으며, 오세창이 직접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규장각본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본은 모두 교토대[京都大]본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국외에 일본의 동양문고본(東洋文庫本)과 정가당본(靜嘉堂本), 교토대본이 있다.
장서각 소장본은 다른 판본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주를 소자(小字) 처리해서 본문에 기입한 여타 판본과는 달리 괄호로 묶어 본문과 동일한 크기로 본문에 배열하였다. 그리고 소위 좌차지도(座次之圖)라 불리는 우정국 연회 당시 좌석의 배열도가 석차지도(席次之圖)라 명명, 삽입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다른 판본에서는 모두 12월 6일자에 포함된 내용이 12월 5일자에 배치되어 있는 사실에 있다. ‘入來云云…’으로 시작하여 ‘…竟至日暮’로 끝나는 총 406자의 내용에는 청의 통역(通譯)이 와서 원세개(袁世凱)가 배알함을 원한다고 통고한 뒤 청군(淸軍)이 개입하고, 이에 대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밀리는 김옥균일파와 일본군의 모습, 그리고 인천으로의 피신을 논의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1884년 12월 6일자로 편집된 것이 정상인 듯한데, 아마도 편찬과정에서 다른 판본과 비교·검토하는 과정 중에 발생한 실수인 듯하다.
[자료적 가치]
이 자료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이 직접 남긴 자료로, 당시 정변을 전후한 조선의 사정을 기록한 국내외의 어느 기록보다 구체적인 자료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김옥균 개인에 대한 연구에도 유용할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문헌
  • 『藏書閣의 歷史와 資料的 特性』 / 千惠鳳․尹炳泰 共著 /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6
  • 『藏書閣圖書解題 Ⅱ』 / 國學振興硏究事業推進委員會 / 韓國學中央硏究院, 1997
  • 『(藏書閣所藏) 王室賭書解題 1 : 日帝時期』 / 韓國學中央硏究院 國學振興硏究事業推進委員會 / 韓國學中央硏究院, 2006
  • 「甲申日錄 : 古書解題」 / 李炫熙 / 『國會圖書館報』5·7, 1968
  • 「金玉均의 『甲申日錄』에 대하여」 / 이광린 / 『진단학보』33, 1972
  • 「『갑신일록(甲申日錄)』에 관한 일연구」 / 김봉진 / 『한국학보』12-1, 1986
집필자
1차 집필자 : 허원영, 2차 집필자 : 권석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