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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IG002+JSK+KSM-WM.1597.1111-20130515.K24523
분류
형식분류고서-일기
내용분류개인-생활-일기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찬자
본관 진주(晉州)
생년 1567
몰년 1618
작성지역
지역 한성 (현재주소 : 서울)
작성시기
연도 1597
월일 02/08
정보원표기 정유
형태사항
크기(cm) 세로 : 30.5cm, 가로 : 20.5cm
판본필사(筆寫)
장정선장(線裝)
수량1冊 81張
판식 無郭, 無絲欄, 半葉 10行24字, 註雙行, 無版心
재질종이
표기문자한자
도설倭國地圖
인장
개수형태색깔크기(cm)인문
1정방형적색4.4×4.4cm李王家圖書之章
비고
[청구기호]

K2-4523

[마이크로필름]

MF35-449

[기록시기]

1597.02.08~1600

소장정보
원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현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재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 간양록(看羊錄)

『간양록(看羊錄)』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姜沆)의 3년 간 일본 생활을 기록한 일기로 적국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견문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장서각 소장 『간양록』은 K2-4523본과 B15ID-7본 두 종류가 있다.
K2-4523본은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 왜국의 관제를 적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귀국 후 아직 일본에 남아있는 포로들에게 알리는 격문인 「고부인격(告俘人檄)」, 귀국 후 임금에게 적중의 사정을 고한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환란생활의 시말을 시와 함께 서술한 「섭란사적(涉亂事迹)」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양록』은 저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동안 일본의 사정을 기록하여 본국에 보고한 것으로 그 내용이 사실적이고 생동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간양록』의 핵심을 이루는 「적중봉소(賊中封疏)」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은 일본의 역사와 지리․인물․풍속․관제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일본의 형세와 우리나라 국방 대책을 서로 비교하며 저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어 당대의 전란자료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포로의 신세로 일본에서 교유한 인물들이 후에 일본 주자학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에서 전란의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양국 문화교류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문헌
『睡隱集』 『睡隱看羊錄』
집필자
박진성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의 3년 간 일본 생활을 기록한 일기이다.


원자료제목
표제 看羊錄 全
내제睡隱看羊錄

[내용 및 특징]
『간양록(看羊錄)』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姜沆)의 3년 간 일본 생활을 기록한 일기다.
‘간양(看羊)’은 흉노에 포로로 잡혀갔던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이다. 본래 『간양록(看羊錄)』의 제목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으나, 1656년(효종 7) 저자의 문집이 간행될 때 강항의 애국충절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간양(看羊)’으로 고친 것이다.
저자 강항(姜沆, 1567~1618)의 자는 태초(太初)고, 호는 수은(睡隱)이며 본관은 진주(晉州)다. 전라도 영광(靈光) 출신으로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이며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강항은 1593년 전주 별시 문과(全州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分戶曹參判)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인을 모으기도 했다. 영광이 함락되자 9월에 왜군의 노략을 피해 바닷길로 피난을 가다가 왜군을 만나 포로가 되어 결국 일본으로 끌려가 伊豫州오쓰성[大津城]에 갇히게 되었다. 1598년 6월 오사카성[大阪城]을 거처 7월 다시 교토후시미성[伏見城]으로 옮겨졌는데, 이곳에서 승려 舜首座와 왜장(倭將) 아카마쓰히로미치[赤松廣通]을 사귀게 되었고 그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주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1600년 5월 가족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602년 조정에서는 승의랑대구교수(承議郞大丘敎授)를 제수하였고, 1608년에는 순천교수(順天敎授)를 임명하였으나, 적진에서 자진(自盡)하지 않은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이에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가 1618년 5월 6일에 생을 마쳤다.
이 책의 판본은 목판본과 필사본, 영인본 등이 있다. 현재 장서각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고 있으며 『간양록(看羊錄)』, 『수은간양록(睡隱看羊錄)』, 『수은선생간양록(睡隱先生看羊錄)』 등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또 1657년 간행된 저자의 문집 『수은집(睡隱集)』 4책 가운데에도 「간양록」이 실려 있다. 문집과 별도로 간행된 『간양록』의 간행 시기는 1760년 간행된 『영호열읍소재책판목록(嶺湖列邑所在冊板目錄)』에 나타나고 있어 그 이전일 것으로 여겨진다.
장서각 소장 『간양록』은 K2-4523본과 B15ID-7본 두 종류가 있다. 두 본 모두 필사본이다. K2-4523본은 1책 81장으로 표제는 ‘看羊錄’으로 되어 있다. 표지는 황지(黃紙)에 ‘卍’자형을 새겨 꾸민 선장이다. 책의 첫 페이지 상단에는 ‘李王家圖書之章’이라는 인장과 1656년에 유계(兪棨, 1607~1664)가 쓴 서문이 있고 이후 본문이 시작된다. 본문은 한 면에 10항이며, 한 항에 최대 24자씩 정서하였다. 권말에는 일본에서 입수한 「왜국지도(倭國地圖)」와 1654년 윤순거(尹舜擧, 1596~1669)가 작성한 발문이 실려 있다.
B15ID-7본은 1책 21장에 표제는 ‘看羊錄 乙丑三書’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한 면에 18항이며 자수는 불규칙하다. 책의 앞에 ‘大淸嘉慶十年歲次乙丑內用三書’라 하고 내용에 달의 대소(大小)를 밝히고 있으며, 일길(日吉)⋅천덕(天德)⋅월덕(月德) 등의 날짜 및 연신방위지도(年神方位之圖)를 수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청 가경(嘉慶) 10년인 1805년에 조선에서 간행한 역서(曆書)를 활용하여 필사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3번째 장부터 ‘姜睡隱名沆 看羊錄’이란 제목을 밝히고 내용을 시작하였다.
K2-4523본은 크게 「적중봉소(賊中封疏)」,「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고부인격(告俘人檄)」,「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섭란사적(涉亂事迹)」의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이다. 이 봉소문은 3차례 작성되었다. 첫 번째는 1598년 일본의 <지명>伊豫州</지명>에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지명>울산<지명>사람 <인명>김석복(金石福)</인명> 편에 보낸 것이다. 김석복은 강항이 이미 일본에서 풀려난 후인 1601년 가을에서야 일본을 빠져나와 <인명>이덕형(李德馨)</인명>에게 이 소를 올렸다고 한다. 이덕형은 강항이 이미 살아 돌아 왔으니 이 소를 임금에게 보이지 않고 강항에게 돌려주라고 말했다. 다른 두 벌은 1599년 伏見城에 갇혀 있을 때 <나라명>명나라</나라명> <관직명>차관(差官)</관직명> <인명>왕건공(王建功) </인명>편에 보낸 것이 하나이며, 이것을 베껴 <인명>신정남(辛挺南)</인명> 편에 보낸 것이 또 하나이다. 하지만 신정남 편에 보낸 것은 조정에 도달하지 않았고, 왕건공 편에 보낸 것만 도달하였다. 김석복 편에 보낸 소(疏)에서 강항은 우선 자신이 일본에 잡혀가서 소를 보내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였다. 일본으로 압송된 후 <지명>금산(金山)</지명> <건물명>출석사(出石寺)</건물명>의 승려 <인명>요시히토[好仁]</인명>에게 일본의 지리와 관제, 풍속 등을 얻어듣고 이를 기록하였으며 따로 일본의 지도를 얻게 되자 소(疏)에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를 붙이고, 그 뒤에 일본의 역사, 관제, 지리, 풍속 등을 자세히 밝혔다. 1599년 <지명>후시미성[伏見城]</지명>에 갇혀 있을 때 왕건공(王建功) 편에 보낸 소에서는 그때까지 살핀 일본의 정세를 아뢰고 있다. <인명>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인명>는 1599년 여름에 죽었으며, <인명>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인명>가 조선에 남아 있던 일본 병력과 군수품을 모두 일본으로 철수하도록 했다고 보고하였다. 이제 일본의 정세로 보아 그들이 조선에 화평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며 현재 일본은 명군(明軍)과 조선군이 대마도 정벌을 나설 것이라는 소문으로 들썩이고 있음도 알렸다.
둘째는 왜국의 관제를 적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이다. 이 글은 「왜국백관도(倭國百官圖)」와 「왜국팔도육십육주(倭國八道六十六州)」, 「임진정유입적제왜장수(壬辰丁酉入寇諸倭將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왜국백관도」는 일본의 관제를 기록하고 있으며, 「왜국팔도육십육주」에서는 일본의 행정구역과 지리․풍속․산물(産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임진정유입구제왜장수」에서는 임진․정유년의 두 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 장수들의 신상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당시 권력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셋째는 일본에 남겨진 포로들에게 보내는 격문 「고부인격(告俘人檄)」이다. 그는 부산으로 귀국하자마자 일본 사신을 통해 적국에 있는 동포들에게 일본의 야만성을 비판하고, 동포들이 귀환을 위해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하는 격문을 전하였다.
넷째는 귀국 후 승정원(承政院)에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이다. 강항이 1600년 5월 19일에 일본에서 풀려나 부산에 도착하자 선조(宣祖)가 이 소식을 듣고 강항을 서울로 불러 적중의 사정이 어떠한가를 물었을 때 (같은 해 8월 1일) 이에 대답하여 올린 글이다. 강항은 일본의 재침략 계획에 대해 현재 일본의 정세로 보아 앞으로 몇 십 년 동안은 왜적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또한 대마도(對馬島) 사람들이 조선과 일본을 이간질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를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학문과는 거리가 먼 무지랭이들에 불과하다고 저평가하면서 일본은 인도와 무역을 할 정도로 무역이 발달했으며, 화산의 폭발과 지진 등의 재앙이 끊이지 않는다는 등의 여러 사정도 전하고 있다.
다섯째 부분은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의 시말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으로 1597년 포로가 되던 때부터 1600년 부산으로 돌아오기까지 저자가 겪은 고초와 참담한 심정을 30여 수의 시(詩)와 함께 서술하였다.
[자료적 가치]
『간양록(看羊錄)』은 저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동안 일본의 사정을 기록하여 본국에 보고한 것으로 그 내용이 사실적이고 생동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간양록』의 핵심을 이루는 「적중봉소(賊中封疏)」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은 일본의 역사와 지리․인물․풍속․관제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일본의 형세와 우리나라 국방 대책을 서로 비교하며 저자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어 당대의 전란자료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일본에서 교유한 후지와라세이카[藤原醒窩]아카마쓰히로미치[赤松廣通] 같은 인물들에게 조선의 과거(科擧) 및 예제(禮制)를 가르쳤는데 그들이 이 가르침을 실행하여 훗날 일본 주자학(朱子學)의 시조가 된 점에서 강항은 일본 주자학(朱子學)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주목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간양록』은 전란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양국 문화교류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주기사항
表題 : 看羊錄 識 : 崇禎後丙申(1656)秋 … 弘文館校理杞溪兪棨志 卷末 : 崇禎紀元後龍集甲午(1654)夏門人坡平尹舜擧識 紙質
참고문헌
  • 『宣祖實錄』
  • 『承政院日記』
  • 『睡隱集』
  • 「壬辰倭亂後의 對日本認識」 / 정장식 / 『일본문화학보』 4호, 한국일본문화학회, 1998
  • 「『看羊錄』연구 : 사실 제시와 체험의 형상화」 / 임치균 / 『정신문화연구』 24호, , 한국학중앙연구원, 2001
  • 「한국사상사학(韓國思想史學) : 수은(睡隱) 강항(姜沆)의 일본인식」 / 방기철 / 『한국사상과 문화』 57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
집필자
1차 집필자: 안미경, 2차 집필자: 박진성